문화칼럼

  • Home
  • 인도네시아 알기
  • 문화칼럼
제목 제국의 하수인 되기 원했던 인니(印尼) 귀족들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07-12-30 15:15
▲ 고영훈·한국외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 고영훈·한국외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제국의 하수인 되기 원했던 인니(印尼) 귀족들
4. 아시아의 시련과 도전 ⑦ 쁘라무디아 ‘인간의 대지’


루카치(G. Lukacs)가 말한 것처럼, 역사소설이란 역사적 사건을 되풀이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우리에게 끄집어 와서 그 진정한 상황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태생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오른 쁘라무디아(Pramoedya Ananta Toer: 1925~2006)의 ‘인간의 대지’ 4부작은 그런 의미에서 역사소설의 몫을 다했다. 쁘라무디아는 아시아보다는 유럽과 미국에서 더 유명한 인도네시아 소설가로 중국의 루쉰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그가 쓴 이 소설은 인도네시아의 ‘언론의 아버지’ 띠르또(Tirto Adhisoerjo)를 모델로 하고 있다. 쁘라무디아는 언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노력한 띠르또의 행적에 깊은 감동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 쁘라무디아는 띠르또를 알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외세의 침입을 받았지만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인도네시아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소설의 시대 배경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로 이 시기는 350년 동안 네덜란드 지배를 받은 인도네시아 땅에 민족의식이 태동하는 시기다. 작가는 주인공 밍꺼를 통하여 언론인 띠르또의 사상과 활동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밍꺼는 네덜란드식 교육을 받은 자바의 귀족 집안 아들로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있어 언론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닫는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어 신문에 동족의 아픔을 고발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검열 등으로 여의치 않자 직접 인도네시아어 신문을 창간한다. 의술학교에 다니는 학생인 밍꺼는 네덜란드계 혼혈 아넬리스와 사랑에 빠져 이슬람 전통에 따라 정식으로 결혼하지만, 토착인의 신분으로 혼혈인과 결혼할 수 없다는 식민통치 정부의 판결로 혼인관계를 인정받지 못하고 생이별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밍꺼의 저항의식이나 식민통치의 부당함이 자연스럽게 부각되고, 밍꺼는 인도네시아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이슬람동맹 운동에 투신한다.

쁘라무디아는 이 작품을 통해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인도네시아의 왕족이나 귀족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인도네시아가 식민통치 아래에 놓인 것을 외세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있다. 작가는 인도네시아에 정치부재의 관료국가가 존재했던 것은 식민통치 정부의 정책에도 기인하지만, 독립투쟁이나 자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보다는 오히려 식민통치정부의 하수인이 되기를 원했던 토착 귀족들의 수동적인 태도도 간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유명한 동남아학자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과 직접 교우하기도 했던 쁘라무디아의 민족에 대한 생각은 앤더슨이 민족주의를 설명하면서 주장한 이른바 ‘상상의 공동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앤더슨이 주장한 바와 같이 인쇄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신문과 소설이 민족공동체의 실재를 구성하고 재현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고 짚은 것은 쁘라무디아가 ‘인간의 대지’ 주인공 밍꺼를 통하여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인도네시아어의 사용을 주장한 것과 맥이 통한다.

개별 국가의 민족의식보다는 글로벌리즘이 먼저 대두되는 지금 시대에 쁘라무디아의 ‘인간의 대지’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서양식 교육을 받은 주인공 밍꺼는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서구의 발전된 문명은 수용하자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소설에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협소하고 이기적인 개념의 민족이 아니다. 그의 민족은 식민통치를 비롯한 모든 부자유스러운 상황을 털어버리는, 보편적인 인간으로 구성된 민족이다. 그의 모든 작품을 잇는 끈이 ‘인류애’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소설 제목 ‘인간의 대지’는 결국 ‘인간이 제 구실을 하는 무대’를 희구하는 것이다.

[고영훈·한국외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바로가기